중고로 턴을 하나 들였다.
비가 캣스 앤 독스처럼 오던 날, "이렇게 폭우가 심하게 내리니 내일 사러 오시죠"라고 권고하는 파시는 분의 걱정을 기어이 물리치고 분당까지 뚫고 가서 사왔다.
생활비 떨어졌다는 아내의 도끼눈을 애써 못본 채 하고
이미 십수년을 폐기했던 아날로그 턴테이블을 다시 들이는
시간과 상황을 거르스는 묘한 일탈이 만족감을 주었다.
전 주인으로 부터 손에 들려받은 이놈, Victor QL-Y55F, 우드바디에 주물 플레터라 묵직한게 듬직하니 들고만 있었을 뿐인데 행복하였다.
먼지 쌓인 창고에 쌓아두었던 LP들이 근 십수년만에 빛을 본다. 서너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왠지 버리기가 뭐해서 짊어지고 다녔었는데, 기어이 다시 바늘맛을 보게 된 것이다.
한영애, 들국화, 푸른하늘, 반젤리스, 김현식, 로버타플랙, 사라사테...
딱히 자켓에서라기보다는 가라앉은 과거의 기억들 속에서 판을 꺼내 올려본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오는 것들.
안암동 자취방의 술에 찌든 이불 냄새랑 푸념 지껄이는 후배놈 입냄새랑 친구가 수동 타자기에 반쯤 지껄여놓은 산문을 막 탈출하는 잉크 냄새...
그런것들은 어찌하여 LP판 비닐포장지에 들어있다가 긴 시간을 통과해 이제 풀려져나온다.
나는 큰대자로 뻣어 그것들에 흠뻑 취했다.
지직거리는 판들은 튀던 그 자리에서 튀는 것까지 꼭 같다.
음악들이 꼭 같다. 하덕규가 하던 노래를 꼭 같이 노래한다. 인권이 형도 오랫만에 갈라지지 않은 목상태로 <그것만이 내세상>을 부른다.
아주 아팠던 기억 하나가 살아나 다시 아파왔는데 그 통증이 놀랍도록 생생하여 나는 실제로 가슴팍을 마사지하였다.
신기하다.
그러고보니 내가 중고로 사서 오늘 집안에 들인 것은 턴테이블이 아니라 마술같은 타임머신이구나.
빅터QL-Y55F
http://www.niji.or.jp/home/k-nisi/ql-a95.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