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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기 연습

백탑청연(白塔淸緣)


어제 진봉형과 술을 마시다가
사무치게 즐거웠다. 

20년 전, 서로를 알게되고, 흠모하게 되고, 숭배하게 되어 허름한 안암동 자취방에 짱박혀 몇날 며칠을 술을 마시고, 던져놓은 빈병을 팔아 다시 술을 마시던 때를 떠올리며 양껏 취했다.

그 무렵 우리는 조롱하고 떠들고 기타을 함께 치고, 배를 깔고 누워 '미궁'을 큰 소리로 들었다.

 후배 J는 그렇게 우리랑 지내며 집에 보름이 넘게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느날  그의 할아버지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찾아오셔서 "우리 J 좀 집에 보내주어!" 하셨다.  모두 사죄하고 J의 손목을 할어버지 손에 잡혀 집에 보냈는데, 그 밤으로 다시 도망나와 또 다시 자취방 문을 두드리던 J.
그 밤도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고 형이 만든 새곡 '신애의 일기'를 연주했을게다.

자취방 앞에 바로 중앙 승가대학 <개운사>가 있었는데 새벽이면 비구니 스님들이 동네 목욕탕에 갔다가 돌아가곤 했다. 우리는 밤새 술을 퍼먹다 날이 퍼렇게 밝아오면 밖으로 나와  막 목욕탕에서 나온 비구니 스님들의 파란 머리에서 아지랑이가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감상하곤했다.

문득 요즘 보는 책에 연암과 그 친구들이 우리랑 비슷하게 노시던 대목이 나와 여기다 타이핑해본다.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연암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의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굴던 때였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벗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1772년에서 1773년 무렵 연암은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주도하게 된다. 박제가가 쓴 <백탑성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는 당시 연암의 풍모 및 이 그룹의 분위기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지난 무자(戊子), 기축(己丑)년 어름 내 나이 18,9세 나던 때 미중(美仲)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에다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祝壽)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千古)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신분도 다르고, 나이도 거의 제자뻘되는 친구를 극진한 정성을 다해서 맞이하는 연암의 풍모를 보라! 당시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서 있고, 이서구의 사랑이 서쪽 편에 있었으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상수의 서재가 있었다. 또 북동쪽으로 꺾어진 곳에 유금(柳琴), 유득공의 집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이들은 그 시절 같은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글은 박제가가 이 그룹에 합류하게 되는 순간을 담은 것이다. 이후 그는 한번 이곳을 방문하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면서 시문(詩文)과 척독(尺牘 ;편지글)을 짓고, 술과 풍류로 밤을 지새곤 했다. 얼마나 이 교유에 몰두했던지 아내를 맞이하던 날, 박제가가 삼경이 지나도록 여러 벗들의 집을 두루 방문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을 정도다.

 이들은 매일 밤 모여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연암의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가 그 생생한 리포트다.
 어느날 밤, 한 떼의 벗들이 연암의 집을 방문했다. 미리 온 손님이 있어 연암과 담소를 나누자, 이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와 산책하며 술을 마신다. 손님을 보내고 뒤따라 나온 연암도 함께 술을 마시고 운종가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종각 아래를 거닐었다. 밤은 깊어 이미 삼경. 거리 위에선 개떼들이 어지러이 짖어대고 있었는데, 오견(獒犬)이라 불리는 몽고산 개가 동쪽으로부터 왔다. 이 개는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렵고 아무리 배고파도 불결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사람 뜻을 잘 알아, 목에다 붉은 띠로 편지를 매달아 주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전해주는 명견이다. 혹 주인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주인집 물건을 물고서 돌아와 신표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사신을 따라 들어오지만,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고 굶어 죽는다.
 사람들은 이 개를 '호백(胡白)이'라고 부른다. 오랑캐 땅에서 온 흰둥이라는 뜻이다. 이덕무는 먼저 이름을 바꿔 주었다.

무관(이덕무)이 술에 취해 '호백(豪伯)'이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잠시 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무관은 구슬프게 동쪽을 향해 서서 마치 친구라도 되는 듯이 '호백아!' 하고 이름을 부른 것이 세차례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시끄러운 거리의 개떼들이 어지러이 내달이며 더욱 짖어댔다.

 '호백이'의 고독한 모습에 자신들의 처지를 오버랩시킨 것일까? '호백(豪伯;호탕한 녀석 혹은 멋진 놈)이라는 '닉네임'에는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호백이'를 부르는 소리에 왠지 서글픔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운종교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언젠가 다리 위에서 춤추던 친구, 거의를 타고 장난치던 친구 등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펼쳐진다. 그러다 보면 새벽 이슬에 옷과 갓이 젖고, 개구리 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아 온다. 이것이 이들이 함께 보낸 날들의 풍경이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이 '지식인 밴드'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이들의 모임에는 늘 음악이 함께 했다. 홍대용의 탁월한 음률 감각은 이미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그밖에도 이들 주변에는 풍류인들이 적지 않았다. 효효재 김용겸 역시 그 중 한 사람. 그는 당시 도시 유흥의 번성을 주도한 예인들의 패트론 중 하나였다.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김용겸이 달빛을 받으며 우연히 들렀다가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김용겸이 책상 위의 구르 쟁반을 두드리며 <시경>의 한 장을 읊었는데 흥취가 한참 무르익을 즈음, 문득 일어나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홍대용과 연암은 함께 달빛을 받으며 그의 집을 향해 걸었다. 수표교에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큰 눈이 막 그쳐 달이 더욱 밝았다. 아, 그런데 김용겸이 무릎에 거문고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 앉아 달을 바라고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환호하며 술상과 악기를 그리고 옮겨 흥이 다하도록 놀다가 헤어졌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런 점에서 '백탑청연'은 연암 생애의 하이라이트아자 중세 지성사의 빛나는 '별자리'다. 그들은 체제와 제도가 부과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윤리와 능동적인 관계를 구성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북벌론에서 북학으로 사상사의 중심을 변환한 것도, 고문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체적 실험을 감행한 것도 모두 이런 역동적 관계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리라......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