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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기 연습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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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 The Desire of Ages 라명훈 作 / 레이소다


소통한다는 것에 사람들이 많이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설득의 기술>이 부족해서일까요? <대립의 기술>이 부족해서일까요?

제 생각엔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보처리 과정이  너무나 복잡하고 복잡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말로 소통이 온전히 가능하기엔, <말>이라는 것이 너무 구멍이 뻥뻥 뚫린 의사소통 툴이어서 모든 걸 다 전달하기 힘듭니다. 대나무 소쿠리처럼 큰 덩어리만 걸리고 작은 것들은 숭숭 밑으로 빠져버리죠.
형이상학이 실체와 실제를 언명할 때 어떤 고정된 상을 추상화시켜내는 원리처럼, 말도 단지 말이 지칭하는 어떤 현상과 존재의 언저리의 것들을 끌어모아 수렴하는 어떤 지점일 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돌아버리는 것도 그래서겠죠.

어떤 단어에는 그 단어가 지칭하는 간략한 카테고리 말고도 수많은 연관 카테고리들이 얽혀있게 마련입니다.
<장미>라는 단어는 그 <장미>이외에도 붉은 꽃잎과 날카로운 가시, 푸른 줄기, 그것이 피어있던 학교의 정원이라든가, 진한 향기라든가...많은 이벤트가 수렴하고 있는 어떤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나눌 때 <장미>에 얽힌 그 복잡한 프로세스를 함께 할 프로토콜이나 규약이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규약이 정해지는 것이 원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보의 배달사고가 나는 것 같습니다. 오해를 낳는거죠. 오해는 분노를  낳고, 분노는 폭력을 낳고...

오랜 시간을 들여 서로 익숙해진 사람들끼리는 <말>에 덧대어 서로 길들여진 <시간>덕분에,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뭔가 통한다'는 정서적 공통분모 때문에, 배달사고가 날 확률이 줄죠.

그들 서로는, 누군가가 말을 하고 어떤 단어를 구사할 때, 그 단어의 사전적 정의뿐만 아니라 그 단어가 쓰이는 상황과, 과거의 용래, 그의 말버릇 등의 추가 정보를 동원해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캐취하기 때문에 오차가 적겠죠.  친한 친구나 아내에게 해당되는 상황인데, 하지만 이것도 종국에는 불뎅이가 늘 남지요. 저도 아내랑 다투다가 한반도 끝까지 가출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몸이 아닌 이상 뇌속의 수많은 뉴런들의 상호작용을 그대로 따라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일겁니다.

소통하지 못하여 겪는 스트레스, 갈등, 가슴아픔, 눈물들...
그런 것들을 이겨낼 방법이 있기는 있을까요?

아마 없을 듯 합니다.

그나마 제가 아는 방법은 <말>하는 것 뿐이라는 겁니다. 때론 그 <말하기>조차도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야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이겨내며 대화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말하는 것,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 말을 꺼내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
그나마 그것 이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용기를 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