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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의 시대, 그 허와 실

거의 기어서 회사 앞 죽집에 가서 전복죽 한 그릇을 시켰는데 아마 반은 먹고 반은 새 나갔을 것이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위가  빵꾸 났기 때문이다.

죽이 새는 동안 건성건성 뭔가 읽을 거리를 뒤적이다가 죽집 홍보잡지에서 이 글을 발견했는데,
주인 아저씨 졸라서 기어이 한 권 빼앗아왔다. 역시 이영미, 고수다운 글이다.

일만하는 게 일하는 줄 아는 후배놈에게 읽어보라고 해야겠다.





콘텐츠의 시대, 그 허와 실



글·이영미(대중예술평론가) ㅣ 사진·뉴스뱅크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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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너도나도 콘텐츠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디 워>가 심형래 감독과 영화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 때문에, 정작 그 이무기 캐릭터라는 콘텐츠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들을 하는 세상이니, 참 세상은 많이 변했다.


지나고 보니 20년도 안 된 시대의 일이다. 문화의 시대가 왔다고 문화부를 만들어놓고도 여전히 문화 소프트웨어(콘텐츠는커녕) 중요한 줄 모르는 시대가 있었다. 그저 공장 만들고 물건 뽑아내는 것이 여전히 급급했던 시대였다(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하면서 자동차산업 때문에 영화산업에 손해를 끼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는 손에 쥐어지는 물건, 즉 하드웨어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 그때 문화계에서는 소프트웨어에 주목하는 것이 곧 문화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른바 ‘<쥬라기 공원> 신드롬’이 왔다. 영화 <쥬라기 공원> 한 편을 보면서 지불한 돈이, 우리나라 한 해 자동차 수출로 벌어들인 순이익과 맞먹는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문화산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굴뚝 없는 공장으로 불렸던 꿈의 산업인 문화산업은,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술문화가 그저 놀고먹는 베짱이 족속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자동차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예술문화를 단지 얼마의 이익이 남는 상품으로 간단히 환산하고 나니, 그 다음 논리도 아주 단순해졌다. “까짓 거, 그럼 몇 년 집중 투자하고 꿈나무들 키워서 몇 년 내에 <쥬라기 공원> 같은 거 만들면 될 거 아냐.” 이런 생각이 팽배했다. 이런 생각을 정부가 실행으로 옮긴 것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 학교의 초안을 내놓은 이어령 장관의 구상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영상원이 갑자기 설립된 것은(아마, 이어령 장관의 구상을 그대로 민다면, 음악원, 연극원 다음에는 무용원이 설립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쥬라기 공원> 신드롬 덕분이었다.


<쥬라기 공원>과 자동차 산업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제일 싫어한 사람은 정작 영화인들이었다. 영화가 무슨 철근 생산인 줄 아느냐는 것이다. 일반 공산품이 돈을 집중투자해서 몇 년간 기술 배워오고(안 되면 외국인 기술자라도 데려오고) 재료 들여오면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쥬라기 공원> 신드롬의 영향을 받아, 공룡 비슷한 용가리의 컴퓨터그래픽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던 영화 <용가리>가, 그 엉성한 내용 때문에 폭삭 망했던 것을 생각하면, 영화인들의 이야기가 백번 옳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랬다. 소프트웨어를 살려내는 것이 그 안에 담긴 것들, 즉 콘텐츠라는 것을 이제 슬슬 알아가기 시작하던 무렵, 우리의 콘텐츠 이해는 여전히 공룡의 컴퓨터그래픽 같은 것에 집착하는 수준이었다. 정부 탓만 할 게 아니다. 방송국에서 마이크 들고 거리의 시민을 만나면, 십중팔구 우리나라 게임이나 영화가 잘 되려면 미국이나 일본처럼 컴퓨터그래픽과 디자인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했다. 예술문화의 소프트웨어의 성패가, 특수효과나 컴퓨터그래픽 같은 기술적 요소에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기술 중심주의에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화부의 지원이 모두 컴퓨터그래픽이 중시되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분야로 기울었다. 시나리오와 스토리에 지원을 한다고? 그게 불과 10년도 안 된 시대의 이야기이다.


이제는 바야흐로 콘텐츠의 시대이다. 문화산업의 핵심이 콘텐츠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만들어지고 상당한 지원금이 콘텐츠 개발 비용으로 지원된다. 물론 이 기관이 기술 중심주의에 기울고 있던 시절에 정초된 것이라, 콘텐츠를 새로 만들기보다는 있는 내용을 가공·조립하여 2D나 3D 화면으로 만드는 등, 이른바 웹상의 결과물을 훨씬 중시하는 경향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고, 이제야 그것의 시정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문화산업이 결코 과학기술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아마 한류 드라마에 가장 크게 빚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보다 후진국이라 여겼던 중국에서 <사랑이 뭐길래>나 <별은 내 가슴에>가 인기를 끌 때까지도 그런 인식은 없었으나, 우리가 문화상품을 늘 수입해오던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인기를 끌면서 이는 매우 확실해졌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도 특수효과도 없는 그저 그런 불치병 소재 멜로드라마가 일본을 뒤집어놓은 엄연한 사실에, 기술 집착의 태도는 설 곳이 없었다. 이즈음, 하나의 원천소스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원소스멀티유즈의 사례는, 대부분 돈 많이 들이고 첨단 기술이 동원된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터넷소설이나 출판만화 같은 곳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확인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튼튼한 대본이나 여기에 담긴 창의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이야기한다. 겉으로는 이전의 예술 창작과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작가가 머리를 움직여 줄거리를 만들어내고, 화가가 손을 움직여 종이에다 인물 디자인을 스케치하는 것, 그것이 콘텐츠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대장금>이니 <다모>, <왕의 남자> 같은 한국적 소재의 작품이 인기를 모으면서, 역사학 등 인문학적 지식이 새로운 콘텐츠를 창출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첨단과 가장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던 영역이 실제로 문화산업에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는 역설이 확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재미있는 스토리, 그 스토리의 맛깔스런 서술(스토리텔링), 매력적인 캐릭터, 흥미를 잡아끄는 신선한 소재와 새로운 지식 등이 결합된 콘텐츠를 어떻게 해야 많이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장 손쉽게 생각하는 방법은 대학에서 이를 가르치는 학과나 교육과정을 만들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하는 것, 그리고 훌륭한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공공기관에서 지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는 한국의 역사, 설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에 적지 않은 지원을 하고 있다. 이런 첨단 분야에서 지원이 이루어진다는 점은, 늘 가난하고 배고프며 이른바 ‘첨단’이란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였던 인문학계를 고무시켰다. 각 대학에서 문화콘텐츠 관련 학과와 대학원을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문예창작과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문화콘텐츠’란 말이 들어간 새로운 이름을 달고 학과의 체제를 바꾸는 경우도 많고, 여태껏 폐과의 위기에 시달렸던 역사학, 고전문학, 철학 등 인문학 전공 교수들이 이에 결합하면서 이를 인문학의 새로운 활로로 여기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학과에서는 문예창작과의 과목과 경영학, 인문학의 여러 분야, 컴퓨터와 매스커뮤니케이션 분야의 과목들을 개설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교육을 통해 실제 현장에서 활용할 만한 인력이 양성되는가이다. 아마 기획의 하부 인력이나 자료조사원 등을 배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기획책임자와 책임집필자, 연출자를 이런 교육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문학의 여러 분야는, 다양한 소재를 제공할 뿐 그것 자체가 콘텐츠의 핵심은 아니다. 콘텐츠는 구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꿰어 만든 보배인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꿰어서 보배가 될는지 안 될는지 알 수 없는, 다양한 구슬들을 조금씩 맛보게 하는 것일 뿐이다.


기획적 발상이나 스토리텔링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원래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표준화된 기술이며, 아이디어 자체는 아니다. 콘셉트를 잡는 기획적 발상이나 스토리를 짜는 데 고려해야 할 만한 몇 가지 지침을 가르치고 난 후에는, 끊임없는 실습, 집필, 평가, 퇴고, 재집필이 있을 뿐이다. 창작, 혹은 창의적 발상이란 이렇다. 일반적인 것을 가르칠 수는 있지만 그 중 뛰어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표준적 매뉴얼로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 각 분야 개론의 수업은, 어떤 구슬이 어떤 스토리와 맞붙으면 좋을지를 판단하는 통찰력에 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원전자료를 수집하거나 자료조사원의 능력조차도 제대로 키워낼 수 없다.


새로운 인문학적 지식을 창출하는 일이 불가능함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이 분야에서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약간 맛이 없는 빵은 싼 값에라도 팔 수 있지만, 재미가 없는 스토리는 아무리 싸게 팔아도 팔리지 않는다. 문화의 영역은 오로지 우수한 것만 가치 있으며 그것만 살아남는다. 나머지는 창작과 기획 핵심에서 손을 떼고, 매뉴얼에 의해 진행되는 비교적 단순작업인 하부 영역으로 옮겨가야 한다.


많은 학생들이 문화콘텐츠의 전문가를 꿈꾸고 대학에 진학하겠지만, 4년이나 6년 동안 이를 이루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단지 이들은 학과 명칭에 혹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좋은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여건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다양한 인문학 분야에서 다종의 지식이 활발하게 생산되고, 학문 간의 소통, 학문과 문화산업 종사자 간의 소통이 손쉽게 이루어지며, 스토리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창의적 상상력이 좀 더 풍부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의 여건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여유’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사회가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로 장난 같은 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엘리트 백수들이 살기 편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최소한의 노동으로도 생계유지가 가능한 복지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너무나 엉뚱한 결론이라고? 아니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다. 창의력은 과외공부 시키고, 돈 더 주겠다고 회유하고, 시간 내로 만들어내라고 쥐어짜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