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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공부

<그림공부> 프리다 칼로와 욕망의 추구

보풀샘이 숙제로 내준 프리다 칼로를 알아보려고 퍼온 논문이 한 편 있는데, 회사 일 때문에 뜨문 뜨문 읽게 되네요.

칼로의 개략적인 전기을 읽었는데, 이 분 을 좀 따라다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세기는 여성성이 지배할 것이다'라는 게 제 생각인데,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되었는지 추적해야하거든요. 딸아이 '소희'를 갖고나서부터인지, 아내랑 친구가 되고나서부터인지... 아니면 대머리 치료약의 여성호르몬 성분 때문일까요?

하여간 글자가 너무 많아 잘 안읽혀서, 아예 공개를 해놓는 것이 후딱 정리하는 데 압박이 될 것 같아서 공개합니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 댓글이라도 달아놓으면 무조건 읽어야 하잖아요? 답변하려면...

자신의 시간을 디자인하기 위해 블로그를 사용하는 새로운 <스스로 압박법>입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개인적인 용도로 블로그를 사용해도 될까요? 하긴 안될 게 뭐 있겠어요? 블로그라는 게, 원래 개인과 공공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것인데...


(참고로 논문을 다 읽어 볼 생각으로 눈길을 주면, 칼로의 아름다운 자태를 담은 사진까지는 잘 갑니다. 그러나 그 아래 '서론' 이 글자를 보자마자 갑자기 의욕이 팍 꺾입니다. 여러분도 그런지 시험해 보세요. 저는 몇번이나 계속 그러거든요?)


프리다 칼로와 욕망의 추구

  윤 영 순      



1. 서론

남성 중심의 국가적 권력과 사회적 억압이 존재해 온 이 세계에서 ‘여성’이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차별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이하 ‘프리다’로 표기함)의 경우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1950년대까지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의 세 번째 부인으로, 남편의 바람기로 고통 받는 여인으로, 신체적 불행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녀는 남다르게 두드러진 의상과 용모로 인해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는 화려한 한 여인으로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오히려 화가로서의 그녀의 정체성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녀는 멕시코, 미국, 유럽 등의 몇몇 전시회에 작품을 내긴 했지만, 평생을 통틀어 개인전은 두 번밖에 갖지 못했다. 그것도 1938년 미국의 줄리안 레비 화랑에서 열린 것을 제외하면, 조국 멕시코에서는 현대 예술관(Galería de Arte Contemporáneo)에서, 그것도 죽기 1년 전인 1953년에 단 한 번 열렸을 뿐이다. 그러한 경향은 대부분의 프리다 관련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프리다의 예술에 대해서 써 달라고 청탁받은 글조차도 그녀의 흥미로운 인생 역정과 리베라와의 관계, 화려한 개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처음으로 프리다의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 사람은 앙드레 브레통이다. 그러나 브레통의 글에서 일부 날카로운 지적이 있기는 하지만, 글의 대부분을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속성과 개인적 전망에 할애했다. 브레통이 그때 언급했던 프리다의 그림은 1937년에 그린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초상화>(Autorretrato dedicado a León Trotsky)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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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에 그린 <물이 내게 준 것>(Lo que el agua me dio)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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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프리다가 천재의 부인으로 요염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후자는 초현실주의를 모르는 프리다가 자생적으로 그린 아주 초현실주의적 그림이라고 평했다.1) 브레통과는 달리 1938년 버트렘 월프(Bertram Wolfe)는 「리베라 부인의 등장」(Rise of Another Rivera)이라는 글에서 프리다를 무대 중심에 세웠다. 아직 브레통처럼 프리다와 리베라와의 관계, 그녀의 퍼스낼러티, 그림의 나이브한 요소(일명 이발소 그림) 등을 강조하긴 했지만, 월프는 프리다에 대해 처음으로 전기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들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프리다를 소개한 것은 공교롭게도 남편 디에고 리베라에 의해서다. 그는 「프리다 칼로와 멕시코 예술」(Frida Kahlo y el Arte Mexicano, 1943)에서 프리다의 예술을 전기의 보조물로 축소시키지도 않고 그녀의 화려한 개성이나 자기 아내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프리다의 작품이 멕시코 대중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온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시도한다. 196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영화제작을 하는 카렌(Karen)과 데이비스 크로미(Davis Crommie)가 <프리다 칼로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Frida Kahlo)이라는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멕시코 밖의 다른 나라에서 프리다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한 첫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1) 프리다는 줄곧 자신은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며 초현실주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비록 1937년에 파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되어 프랑스를 방문하고, 그 다음해 멕시코에 온 앙드레 브레통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와 교류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벌써 초현실주의가 종반에 접어들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상황에 있었다. 1940년에 브레통이 그의 친구들과 멕시코에 다시 온 이유도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을 이용한 초현실주의의 부흥 또는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1920년대 초에 시작되어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초현실주의를 화가였던 프리다가 몰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멕시코의 잡지와 신문에는 1925년 그녀가 버스 사고를 당할 무렵부터 suprarrealismo 또는 superrealismo 등의 이름으로 초현실주의가 소개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31년에 <루터 버뱅크> 같은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프리다의 그림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도구인 자동기술을 이용한 기법이라든가 몽환적인 스타일로 치우치지는 않았고, 현실의 단편들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충격적으로 결합시키거나 콜라주 기법이나 상상력으로 사물을 변형시켜서 현실과 자연스럽게 융합시키는 등의 기법으로 자신의 민화적 그림 스타일에 적절히 차용하였다. Cfr. Raquel Tibol, Frida Kahlo: una vida abierta, p.184. Orli Monakier Klein, Frida Kahlo y el surrealismo, pp.20-21.

프리다 사후 20년이 가까운 1976년에 와서야 멕시코에서 그녀를 다룬 첫 책이 출판된다. 테레사 델 콘데(Teresa del Conde)가 쓴 『프리다 칼로의 삶』(Vida de Frida Kahlo)이 54쪽 분량으로 출판되었고, 1977년에는 라켈 티볼(Raquel Tibol)의 『프리다 칼로: 연대기, 증언 및 관련자료』(Frida Kahlo: Crónica, Testimonios y Aproximaciones)라는 책이 나온다. 아르헨티나의 저널리스트였던 저자가 프리다가 죽기 일 년 전에 멕시코에 와서 그녀와 했던 인터뷰를 비롯해서 편지, 의료기록, 그밖에 중요한 일차적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83년에는 헤이든 헤레라(Hayden Herera)가 더 광범위한 자료들을 동원하여 당시 멕시코 정치̣̣·사회 상황과 연계시켜서 프리다의 생애를 연구한 『프리다: 프리다 칼로 전기』(Frida: A Biography of Frida Kahlo)를 출판한다. 이 책에서는 프리다의 삶을 크게 두 개의 축으로 나누어서 다양한 삶의 양상을 다루고 있다. 그 두 축은 그녀를 평생 동안 따라다닌 신체적 고통과 디에고 리베라를 향한 애증이었다.

헤레라가 프리다의 성인 시절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1988년 살로몬 그림베르크(Salomon Grimberg)의 연구는2) 어린 시절의 정신적 충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작품에 대한 심리적 해석인 것이다. 그는 프리다의 퍼스낼러티에 대한 열쇠는 엄마와의 충족되지 못한 관계에 의한 깊은 고독감으로 보고 있다. 프리다는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프리다의 디에고 리베라와 그 밖의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는 바로 이렇게 뒤틀린 원초적 관계의 변형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녀가 18세에 겪었던 치명적 사고나 어릴 때 걸렸던 소아마비, 그 이후의 여러 차례의 수술과 합병증에 의한 육체적 고통도 주위의 관심을 끌고 그녀의 그칠 줄 모르는 사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된 장치들로 간주한다.3) 오늘날에도 세계 각처에서 프리다에 대한 책들이 계속 출판되고는 있지만 대부분 기존에 알려진 내용들을 전기적으로 다시 꾸미거나 내용을 조금 보완하여 내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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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리다의 그림을 얼핏 보면 멕시코 민화나 아마추어가 그린 성화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그림들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또한 그녀의 삶과 그림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자전적 내용을 그림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많은 연구자들이 했던 전기적 비평을 지양하고, 그녀의 주요 작품들을 수시로 인용하면서 프리다의 자아 찾기 또는 자아 만들기 과정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알아보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그림베르크의 고독감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고독감이 총체적 자아를 갈망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려는 욕망에 기인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2) Helga Prigninitz-Poda, Salomon Grimberg, and Andrea Kettenmann, eds, Imaging Her Selves: Frida Kahlo's Poetics of Identity and Fragmentation.
3) 프리다 관련 연구 정리는 Gannit Ankori, Imaging Her Selves: Frida Kahlo's Poetics of Identity and Fragmentation 을 참고했음.



2. 시대적 배경

멕시코의 고대 메소아메리카 여인들은 남성들과 거의 동등한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위치는 아스테카 제국이 들어서면서 점점 와해되기 시작했고, 스페인 인들이 도착했을 때는 가부장제도로 이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스페인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폭력적인 가부장적 체제가 확고해짐에 따라 원주민 여성들은 그동안 누려왔던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농업에 종사하던 노동력은 상당 부분 귀금속 채광이나 원자재 생산에 투입되었고, 여자들은 성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기 시작했다.4)


반면에 백인 여자들의 사정은 달랐다. 단지 아름답다거나, 좋은 어머니, 충실한 아내 역할 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독립 시기에 가까이 오면서 일부 예외적인 여걸들이 등장한다. 콜롬비아에서는 마누엘라 벨트란(Manuela Beltrán)이 1781년에 스페인의 새로운 세금 부과에 항의해 시청을 습격하는 선봉에 섰고, 사령관으로 추대되어 군대를 이끌고 수도 보고타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독립 이후에는 베네수엘라의 호세파 카메호(Josefa Camejo), 칠레의 하비에르 카레라(Javiera Carrera), 파울라 하라케마다(Paula Jaraquemada) 같은 인물들이 두드러진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은 되었어도 전반적인 여인들의 상황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 멕시코의 여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잘 말해 주는 일화가 있다.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 첫 부임한 스페인 대사의 부인이 1839년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멕시코 여인들은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책도 읽지도 않고, 글도 쓰지 않으며, 사교 생활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놀이도 하지 않으며, 그림도 그리지 않고, 연극도 보지 않고, 춤도 추지 않고, 공연도 보지 않고, 거리를 산책하지도 않고...” 그러자 부인이 다시 물었다. “하지 않는 것은 그만하면 알았어요. 무엇을 하느냐고요?” “주로 베푸는 일에 종사합니다. 헌신적으로 가족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느라고 여가를 즐길 한가한 시간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지요.”5)

물론 아주 가난한 여인들은 더 비천한 일에 종사해야 했지만, 예외적으로 일부 귀족 부인들, 여류 작가들, 수녀들, 여자 독립 영웅들이 있었다. 멕시코의 경우에는 여자도 철학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당당히 교리논쟁을 벌였던 소르 후아나(Sor Juana Inés de la Cruz)가 문필가로 두드러지며, 독립 영웅으로는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댄 레오나 비카리오(Leona Vicario), 케레타로에서 봉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일명 ‘라 코레히도라’(la Corregidora)라고 불리는 호세파 오르티스 데 도밍게스(Josefa Ortiz de Domínguez) 등이 유명하다.6) 그러나 20세기가 될 때까지 일반 여인들의 생활이란 대개 위에서 언급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것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중남미 모든 나라에서 대동소이했다.

1910년 멕시코는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30년 동안 독재 정치를 펼치며,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나름대로의 근대화를 진행시켰으나 자본이 외국인에게 집중되고 더구나 극소수에게 이익을 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심지어 중류층까지 그의 비민주적 독재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드디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 100주년이 되는 이 해에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에는 농촌의 여인들이 토지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1916년에는 유카탄 주에 첫 여성 의회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또 전투에도 대규모로 참여하였다. 주로 농민의 딸이나 과부들로 구성된 여군들이 에밀리오 사파타 (Emilio Zapata)장군과 함께 싸웠다.7)

멕시코는 혁명을 겪으면서 아주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다.8)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대중예술과 원주민 문화가 부상하였으며, 민중들은 새 시대에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멕시코시티에는 농민들과 행상들이 거리를 채웠고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나 교통수단들도 급격히 늘어났다. 교육의 기회도 확대되어 도시 중산층이 아니어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관공서 건물에는 멕시코의 역사와 세계의 흐름, 멕시코의 미래 등을 담은 대형 벽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린 프리다가 코요아칸 거리에서 뛰놀고 있을 때는 아직 멕시코 인들의 가슴에 그 혁명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태였다.

4) 당시 스페인 주도 아래서 행해지던 세계화의 흐름에 여성들도 강제로 동참해야 했으며 스페인에서는 가격혁명이 초래되어 아메리카 대륙은 더 많은 원자재를 생산해야하는 기지로 전락했다.
5) Calderón de la Barca, cartas del 28 de febrero de 1840 y el 10 de noviembre de 1841, pp.156 y 533. Citado por Silvia Marina Arrom, Las mujeres de la ciudad de México, p.13.
6) Ángeles Mendieta Alatorre, La mujer en la Reviolusión Mexicana, p.23.
7) 그러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1917년 헌법에서 여성 투표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1921년 조직적으로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으나 1953년에 가서야 겨우 받아들여졌다. Cfr. Luis Vitale, Historia y sociología de la mujer latinoamericana, pp.43-44, 48.
8) 실제로 프리다는 1907년 7월 6일에 태어났지만 그녀는 1910년에 자기가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1910년은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그녀는 스스로 혁명의 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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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핍과 욕망

이러한 혁명의 활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프리다의 경험은 민중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리베라와의 사상적 동지로서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게 한 배경이 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멕시코 또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남성위주의 역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기의 여걸들과 혁명기의 여성들의 활약은 프리다에게 여장부나 혁명가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며 삶의 모델이 되었고, 요로나9)의 이미지는 고통 속에서 살아 온 여인들의 전형이 되어 그녀에게 다가왔다. 또한 메스티소의 상징적 어머니인 말린체(Malinche)는 프리다에게 자신의 뿌리와 멕시코에 대한 의인화로 받아들여진다.10) 그녀가 살던 시대에도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인 사회 구조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프리다를 이야기하면서 성적 차별에 의한 사회적 억압을 주제로 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프리다의 삶이 페미니스트들의 연구 대상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특별히 심각한 성적 차별로 인해 고통 받았다든가 그러한 차별을 의식하고 여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일도 없기 때문이다. 프리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고 한계상황까지 몰아간 것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구조가 아니라, 그녀가 남달리 겪은 개인적 불행이었다.11)

9) 요로나(La Llorona) 전설: 마리아라고 하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드디어 그 수준에 버금가는 청년이 마을에 오자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두 딸까지 두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떠나버리고 몇 년이 흐른 후에야 딸들을 보기 위해 돌아왔으나 그녀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 극진한 것에 질투심을 느낀 그녀는 드디어 두 딸을 강물에 던져 버린다. 곧 후회하며 울부짖었지만 자식들은 이미 강물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튿날 그녀는 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지만 아주 어두운 밤이면 하얀 드레스를 늘어뜨린 여인이 강가를 거닐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프리다가 그림에서 흘리는 고통의 눈물은 바로 이 전설 속 요로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10) 말린체를 주제로 한 그림도 그렸다.
11) 그녀의 신체적 불행에 비하면 경제적 어려움은 미미한 것이었다.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가 디아스 시절 정부가 기획한 사진 사업에 참여한 덕분에 약간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다가, 혁명을 거치면서 궁핍해진 시기를 겪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프리다 부부의 후원자이면서 친구인 돌로레스 올메도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 소수의 여성만이 국립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프리다는 2천명의 남학생들 가운데서 공부를 계속했던 최초의 35명의 여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프리다를 편애해서 공부를 계속시킨 점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극심한 가난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도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면서 해소되었다. Cfr. 르 클레지오,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p.65.



3.1. 고통과 결핍

결핍과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원칙이다. 프리다의 개인적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 또한 결핍의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그 욕망 자체는 존재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품들은 이러한 그녀의 욕망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옥타비오 파스는 그의 수필집 『활과 리라』에서 기본적으로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보고 있다. “욕망의 목소리는 바로 존재의 목소리이다. 존재란 존재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12) 그녀의 결핍에 대한 자각은 육체적 결핍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리다의 불행은 여섯 살이었던 1913년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다리를 저는 그녀를 놀려대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셋째 딸에게는 언제나 냉담했고, 프리다는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이런 고독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언니이자 친구처럼 지내던 마틸데마저 가출하면서 그녀의 쓸쓸함은 더 깊어갔다. 하지만 12년 후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18세 생일을 갓 지난 1925년 9월 17일 프리다는 버스를 타고 가다 전차가 버스를 들이받는 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척추를 포함해서 온 몸의 뼈가 부서져 버렸고, 버스의 쇠 파이프가 배를 뚫고 옆구리를 관통해서 밖으로 나왔다.

그 이후로 프리다는 애인이었던 알레한드로 고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에게 전할 유일한 희소식은 이제 내가 고통을 참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라고13) 말했던 것처럼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곧 고메스와의 결별로 한 차례 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어 고독과 절망에 빠진 자신을 본다. 이제는 고독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프리다의 고독은 실존주의자의 철학적 고뇌가 아니라 이렇게 생활 속에서 시작된다.

프리다가 결핍을 느낀 또 하나는 아기에 대한 것이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그녀는 유난히 아이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심지어 자신이 아끼던 인형에게 세례증명서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레오나르도: 서기 1925년 9월 적십자 병원에서 태어나 그 다음해 코요아칸에서 세례 받았다. 어머니는 프리다 칼로, 대모와 대부는 이사벨 캄포스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였다.14)


쿠에르나바카에서 낙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디트로이트에서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다. 버스 사고의 후유증, 선천적 자궁 기형, 게다가 매독까지 걸린 프리다는 의사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아이를 낳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하혈을 하고 유산을 한다. 여러 번의 임신 중절과 유산의 경험은 그녀를 그림에 매달리게 했다. 그때의 작품들이 <프리다와 제왕절개>(Frida y la cesárea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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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병원>(Hospital Henry Ford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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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탄생>(Mi nacimiento 1932) 등이다. 프리다에게 있어 그림은 자식과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그림은 고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림은 삶에 의해 완성된다. 나는 세 아이를 잃었다.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15)


헤레라의 책 한국판 표지에 사용되기도 한 <부서진 척추>(La columna rota, 1944)는 사고로 인한 고통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비록 얼굴에 눈물은 맺혀 있지만 고통을 참고 있는 근엄한 표정은 사고 후 20여년을 거치면서 인내하는 강인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조각조각 부서진 척추와 갈라진 땅은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하며, 그 고통의 정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헤레라는 이 이오니아식 기둥 모양을 한 부서진 척추를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며 성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16) 현대 사업사회의 산물인 기계(버스, 전차)를 남성으로 본다면 그는 이 거대한 남성 세계에 의해서 그녀의 육체가 파괴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기둥이 부서져 있으므로 헤레라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이 기둥은 남근이 아니라 ‘프리다’라는 여신을 모시고 있는 신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그 기둥이 조각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신전(또는 여신의 몸)은 무너지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참아내고 있다. 처음에는 완전 누드였으나 나중에 아래의 엉덩이 부분을 흰 천으로 감쌌는데 그것은 몸 곳곳에 꽂혀있는 못들과 함께 그녀를 순교자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준다. 여기서 척추 못지않게 우리의 시선을 잡아두는 부분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이다.17) 아름다운 가슴은 기둥이 몸통을 가른 처참한 고통과 명백한 대비를 이루면서 그 아픔을 더욱 강조한다. 이것은 화가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자신의 육체적 결핍을 보상받기 위해 종교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를 동원하여 캔버스에 표출해 놓은 것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같은 쾌감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림을 보는 감상자를 제 3자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녀의 고통에 동참시키며, 동정의 단계를 넘어 놀람과 경외감을 주기까지 한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랑이다. 프리다는 그를 ‘나의 영혼’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랑했다. 그러나 리베라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픔을 주기도 했다. 리베라의 계속되는 여성 편력은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프리다의 머릿속에 리베라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내 마음속의 디에고>(Diego en mi pensamiento, 1943)라는 작품에서 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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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있어 리베라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좀 유치하게까지 생각되는 이 그림은 프리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담고 있는 자화상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 리베라와 자신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불륜관계를 알게 되자,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다. 이때의 고통을 <단지 몇 번 찔렀을 뿐>(Unos cuantos piquetitos, 1935)이라는 그림으로 그렸다. 제목과는 달리 그림에 나오는 여인의 나신은 온몸이 칼에 난도질당한 모습이다. 리베라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는 그 일이 프리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과 동일시했던 사랑이 상처를 입자 프리다는 허무에 빠졌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출구가 필요했다. 아니타 브레너와 함께 뉴욕까지 경비행기로 날아보기도 했고, 여러 남자들, 때로는 여자들과도 연애를 했다. 그들 중에는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사진가 니콜라스 머레이, 레온 트로츠키도 있었다.18) 르 클레지오는 프리다가 리베라의 질투심을 부추기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19) 그러나 그런 면보다는 그동안 사랑하는 디에고 리베라 한 사람에게 얽매였던 정조 관념이 와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믿었던 사랑의 대상에게서 충족감을 얻지 못한 프리다는 그 허전함과 고독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욕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목마름을 순간적으로 달래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디에고 리베라처럼 큰 강물은 아니었다.

12)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p.237.
13) Raquel Tibol, Escrituras de Frida Kahlo, p.68.
14) Frida Kahlo, Escrituras de Frida Kahlo, p.71.
15) 헤이든 헤레라, 『프리다 칼로』, pp.202-203.
16) Hayden Herrera, Frida Kahlo, p.182.
17)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출간된 프리다 칼로의 일기책 서문에서 이 그림을 껍질을 벗기고 절반으로 잘라서 벌려놓은 열대 과일 ‘파파야’에 비유했다.
18) 그 외에도 여류 무용가 마사 그레함, 루이즈 네벨슨, 클레어 부스 루스, 여배우 에들러 프렌코, 화가 조지아 오키프, 엘린 맥 마흔, 진저 로저, 샘 A. 루이슨, 넬슨 록펠러 등이 있다.
19) 르 클레지오, op.cit., p.190.



3.2. 근원에 대한 갈망

프리다의 초기 작품들은 자기라는 개인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선 자신의 고통과 대면해야 했던 것이다. 고통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고 그것은 자신의 근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가계도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후기 작품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초상>(Retrato de mi padre, 1951)에서도 그런 관심은 여전히 이어진다.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난자와 정자들로 장식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동기가 자신의 근원과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고아 의식이라고 한다. 어떤 알 수 없는 근원으로부터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다.





1932년에 그린 <나의 탄생>에서 프리다는 산고로 죽은 어머니의 몸에서 빠져나오려고 힘쓰는 아기로 표현된다. 충격적인 장면과 상징성은 감상자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어미의 도움 없이 스스로 태어나려는 아기의 얼굴은 나이가 들었으며 눈을 감은 채로 축 늘어져 있다. 프리다의 신체적 불행과 자유분방한 삶 이면에는 이처럼 자신의 수동적 일상을 파괴하고 탄생하는 인간의 원죄와 비극에 대한 성찰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후 디트로이트로 돌아 온 후에 완성되었다. 그녀 자신이 태어나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 놓은 것인데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화면이다. 여성의 음부를 드러내 보여주는 누드 그림이지만, 남성이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위한 것은 아니다. 남성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 본 누드다. 산모는 하얀 시트로 덮여 있어서 죽음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림 아래쪽에는 띠처럼 빈 공간이 있는데 글씨를 써넣을 자리임에도 아무런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다 프리다는 아마도 태어나면서 세계와 대면하며 신이 아닌 존재이기에 결핍의 상황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을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내 머리를 가린 것은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프리다는 자기를 출산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를 “내 머리”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일기에 적힌 다음의 내용을 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스스로를 낳은 사람, 자기의 삶을 가지고 가장 멋진 시를 쓴 사람.”20)


이러한 조건을 의식하고 자신의 탄생을 제 3의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의 탄생>은 헤레라의 분석대로 프리다가 “스스로를 출산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21) 결과적으로 침대 시트로 산모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스스로를 탄생의 순간에 직면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 이처럼 프리다는 경험을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인류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이러한 예술가들의 경향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을 시도 한다. 프로이트는 예술을 “유년 시절에 기원을 두고 있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의식에 잠재된 본능의 충동”이라고 생각한 반면 융은, 예술은 성숙된 삶의 표현이며, 창조의 역동적 에너지의 원천인 무의식의 활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을 병리적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융에게 있어 예술 작품은 개별적 무의식의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인류의 공동 유산인 집단 무의식의 결과다.

프로이트는 그의 짧은 수필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어릴 적 두 명의 어머니를 가졌던 사실이 어떻게 나중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신화적 테마다 [...] 그 환상은 영웅들이 두 명의 어머니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기억보다는) 인류의 공통 정신에 비밀스럽게 씨 뿌려진 ‘원초적 이미지’다 [...] 개인적 기억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이 환상들이 전이의 넓은 양상 속에서 재생될 때, 우리는 그 환상들을 인류의 공통된 원초적 이미지가 잠자고 있는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위들이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 무의식, 비개인적 무의식, 초개인적 무의식을 구분해야 한다. 이 제일 마지막 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개인적 무의식과는 달리, 아주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2)


여기서 ‘집단적’이라는 형용사는 융이 말한 대로 개인적인 것을 넘어 공통적인 무엇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 인이 느끼는 고독감은 멕시코 인들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고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23) 그렇다면 자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은 인류에게 있어 본능적인 그 무엇이며, 이 무엇에서 야기된 고독은 인간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가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다. 따라서 프리다는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0) 헤이든 헤레라, op.cit., p.214.
21) Ibid., p.214.
22) Carl G. Jung, Two Essays on Analytical Psychology, pp.66-68.
23) Cfr. Octavio Paz, El laberinto de la soledad, pp.87-89.



3.3. 욕망과 자화상

심리학자 필리스 그린에이커(Phyllis Greenacre)에 따르면, 오늘날 인간에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가 자아의 개념에 중요한 기초를 이룬다고 한다. 대개는 성숙한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지만, 갑작스런 질병이나 사고로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경우에는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가 아니더라도 어린 아이나 철학자, 예술가, 일부 환자들은 끝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하고 문제로 삼는다고 한다.24)

프리다는 1926년 처음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해서 1954년까지 자신이 등장하는 그림을 100여 점이 넘게 그렸다. 그러나 한 점도 중복되지 않는다. 침대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달고 안쪽엔 거울을 달았다. 스스로 자신의 그림의 모델이 된 것이다. 그 외에도 방 곳곳에 거울을 설치했고 욕실에도 여러 개의 거울을 걸었으며 심지어 정원에 있는 문에도 거울이 있었다. 거울은 이처럼 그녀의 자화상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 거울 자체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완전히 반영할 수 없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프리다는 거울의 매력적인 기능에 빠져들었다. 아마 거울이 없었다면 그 많은 자화상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라캉이 언급한 거울 단계의 아기를 연상시킨다.25) 물론 프리다는 거울단계의 아기처럼 그 거울의 이미지를 자신의 실체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거울’을 매개체로 해서 ‘자신’에 대한 사고를 시작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단순히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프리다는 자신의 얼굴에 고통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통을 숨기는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고통과 분노, 인내, 소망, 사랑, 자연과 사회에 대한 사고 등을 모두 함축적으로 담아내려고 했다. 비록 자신의 사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프리다의 그림은 그녀가 ‘자아’라는 문제를 심사숙고하면서 혁신적인 방식으로 시각화시키고 있음을 나타낸다. 프리다의 몸에 대한 이미지는 자아라는 개념과 육체적 존재라는 복잡한 관계에 대해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신의 불행한 상황에 그냥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간이 근본적으로 처하게 되는 자아와 존재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사고하려 했다.

작품에서 그녀의 몸은 옷을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장식도 하면서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몸은 외부적 세계에 의해서 감지될 수 있고 특정 개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외적 현전이다. 그러나 프리다의 그림은 그녀가 이러한 몸의 이미지를 인식하고 있음과 더불어, 또한 몸이, 주관적으로 혹은 내면적으로 느끼고 있는 실체를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그녀의 몸은 객관적인 신체적 자아와 주관적인 경험적 자아의 양상을 동시에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26)

따라서 프리다에게 몸은 옷, 즉 외관이자 상징이다. 달리 말하면, 몸과 얼굴을 그리면서 끝없이 자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세계와 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 다시 내면에 영향을 주는 순환의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순환 구조와 유사한 시스템이 불교에서도 발견된다. 불교의 『해심밀경(解深密經) Samdhi-nirmocana-sutra』과 이를 토대로 발전한 유식학파에서는 우리가 대상을 지각하는 식(識)을 다음과 같은 이름의 층(層)으로 나누고 있다.

육식(六識): 안(시각), 이(청각), 비(후각), 설(미각), 신(촉각)
말나식(末那識): manas-vijana, 제7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ana, 근본식, 제8식


수행을 통하여 대상에 집중을 하고 대상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각(覺)의 순간에도 평상시 느끼고 생각하는 육식은 사라지지만,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뭔가 근원적인 것이 있어서, 선정 이전이나 이후에도 같은 기억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식을 아뢰야식(alaya- vijana)이라고 한다.27) 그러나 이 근본식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업, 즉 신체적 행위이든, 언어적 행위이든, 또 의지적 행위이든, 어떤 행위도 알라야식에 영향을 끼친다. 바로 이 영향력을 어떤 냄새 속에 오래 있으면, 그 냄새가 몸에 밴다는 뜻에서 훈습(熏習)이라고도 한다. 미혹된 업(業)이 알라야식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으로 변화된 알라야식이 다시 미혹된 현실을 낳고 하면서 순환의 고리를 이루는 것이다.28) 이러한 자아의식의 훈습과정은 그 많은 자아상을 그리고 또 그렸던 프리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화상에 반영하고 그렇게 형성된 외부적 자아가 다시 심층의 자아에 영향을 주면서 끝없이 변증법적으로 자아를 만들어 간 것이다. 이때 프리다의 진정한 자아는 외부와 심층을 모두 아우르는 차원에 위치하며 그것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언제나 진행형이다.

24) Cfr. Phyllis Greenacre, “Early Pysical Determinants Developmente of the Sense of Identy", Emotional Growth, pp.614-626.
25) 6-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거울을 보고 거기에 비친 모습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라캉은 이것을 거울 단계라고 말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초기 단계라고 한다. 아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합적이고 완전한 것(이상적 자아)이라고 믿고 다가가는 이 단계를 달리 상상계로 부르며, 이 단계를 거치면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상징계로 접어든다. 이제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참 모습이 아닌 불완전한 반영이란 것을 알게 된다. 라캉은 이러한 아기의 상태를 예로 들면서 욕망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어떤 대상이 자신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것이라고 여기고 대상을 욕망한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얻어도 욕망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대상을 얻는 순간은 곧 불만족을 의미하며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섬을 의미한다. Cfr. Jacques Lacan, "La significación del falo", Escritos, tomo 2, pp.665-675.
26) Cfr. Gannit Ankori, op.cit., p.42.
27) 의식과 제8식인 알라야식 사이에 말나식(manas)이 하나 더 있다. manas는 생각한다는 뜻의 동사 man에서 온 말로서, 특히 ‘나’라는 생각, 자아의식, 인도말로는 아항카라(Ankara)라고 하는 의미인데, 알라야식을 보고, 그것을 자아라고 오인하는 식이다. 사실 알라야식은 폭포 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인데도 이러한 알라야식을 아트만과 같은 영원한 자아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28) 이기영, 『불연 이기영 전집』, 제 24권 불교개론강의 하권, pp.150-161.



4. 정체성 만들기29)

4.1. 욕망의 삼각형

프리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의 그림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관심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1927년의 <아델리타>(Adelita)부터다. 아델리타는 멕시코 혁명 당시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혁명군을 도와 요리도 하고 빨래도 하고 때로는 성적욕구도 해소해 주던 병영의 여인들을 일컫는 대명사다. 이들은 솔다데라(soldadera)라고 불렸으며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혁명 당시 <아델리타>라는 꼬리도(corrido)가30) 유행해서 이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노래에 등장하는 아델리타는 용감하고 아름답고 이상화된 여인으로 한 하사관을 사랑했기에 이리저리 군대를 따라다니는 솔다데라가 되었는데 나중에 그 군인과 결혼에 이르게 된다.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기 전인 1927년에 이 그림을 그렸으며, 버스 사고가 난 직후에 아델리타와 관련된 그림을 하나 더 그렸다. 이것은 이상화된 여인을 닮고 싶은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과 혁명에 대한 칼로의 관심은 자신의 신체적 고통에 일시적으로 가려져 있었을 뿐, 일찍부터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소설의 주인공들의 욕망의 체계를 분석하였다. 예를 들어, 돈키호테를 매개된 욕망으로 보았으며 이 매개된 욕망에 해당하는 인물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소유자다.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획득하여야 한다.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그 욕망의 대상은 이상적인 기사인데, 그는 아마디스 데 가울라(Amadis de Gaula)라는 기사를 이상적인 기사로 상정하고 그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이때 아마디스 데 가울라는 욕망의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31) 프리다에게 있어 매개체라고 할 만한 특별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이탈리아 출신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였다.

1928년 1월 프리다는 국립고등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소모임에 들어갔다.32) 거기서 티나 모도티를 알게 되었다. 모도티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조수이자 동료였고, 그와 함께 멕시코에 왔다가 멕시코에 정착했다. 당시 멕시코는 혁명 덕분에 정치 망명객들을 보호하고 집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모도티는 공산주의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매력적인 분위기와 재능으로 멕시코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프리다는 예술가로서 모든 것을 혁명에 바친 모도티에게 마음이 끌렸다.33) 또한 모도티의 연인이었던 쿠바인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수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모도티의 영향을 받은 프리다는 검은 치마와 붉은 블라우스를 입었고, 모도티가 선물한 낫과 망치 모양의 장식 핀을 착용하고 다녔다.

그러나 당시의 프리다 칼로가 공산주의 신념에 완전히 빠져든 것은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티나 모도티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사랑의 고뇌, 웨스틴이 찍은 사진들 속에서 볼 수 있는 거리낌 없이 벌거벗은 몸과 얼굴의 진지하면서도 관능적인 아름다움, 민중을 위해 예술을 바친 젊은 여류 혁명가의 열정 같은 것이었다. 프리다 칼로도 이런 이미지를 통해 고통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인생의 고난을 그대로 드러내는 여인들이나 손, 얼굴을 찍은 사진들, 혹은 혁명기를 든 멕시코 여인의 사진들은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그녀의 인생 자체였다.34)


29) 이 글에서 자아라는 말은 ‘자기’ 또는 ‘나’라고 여겨지는 자기의 본질에 대한 성찰적 내면 이미지로 사용하였고, 정체성은 타자와 구별되는 자아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즉 정체성은 사회, 인종, 국가, 신분, 직업 등의 모든 외적인 사항을 고려한 자기임으로 ‘자아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30) “코리도”(corrido)는 민중들 사이에 불려졌던 발라드 풍의 민요 장르다. <라 쿠카라차>(La Cucaracha)도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꼬리도 중의 하나다. 몇 년 전에는 살리나스 전 대통령을 풍자한 코리도도 나왔다.
31) Cfr. René Girard, Mentira romántica y verdad novelesca, pp.9-15.
32) 이미 1917-1925년 사이에 멕시코에서는 마르크시즘은, 특히 노동자 그룹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프리다가 한참 활동하던 1930-1940년대는 과학적 마르크시즘이 절정을 이루기도 했다. 20세기 초 마르크시즘이 세계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특히 멕시코에서는 민중이 힘을 보여준 혁명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고 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정부도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펴려고 했기 때문에 일부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 현상이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마르크스, 엥겔스를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강독회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Cfr. Engracia Loyo, "La difusión del marxismo y la educación socialista en México, 1930-1940", Cincuenta años de historia en México, vol.2, pp.165-166.
33) 티나 모도티 또한 11살이나 어린 프리다의 당찬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이들의 모임이 이루어진 아브라함 곤살레스 집에 프리다는 열심히 출석하였으며, 평범하지 않은 화려한 색상의 의상을 입고 관능적 아름다움을 풍겼다고 한다. 피노 카쿠치는 이 당시 프리다의 자태가 주의를 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기존 관습에 도전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본능적 행위로 보고 있다. Cfr. Pino Cacucci, Tina Modotti, p.113.
34) 르 클레지오, op.cit., p.91.



4.2. 또 하나의 캔버스

우리가 프리다를 말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의상이다. 프리다가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공산당에서 참여하면서부터 그녀의 옷차림은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의 혁명복장 대신 원주민 옷을 입고 다녔는데, 나중에 그것은 프리다의 정장처럼 되어버렸다. 일상생활 속에도 공식 석상에서도 미국에 살면서도 프리다는 언제나 원주민 복장을 입은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멕시코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문화사절 역할도 어느 정도 수행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프리다의 독창적인 시도는 아니었다. 혁명 이후 멕시코 인들은 고대 문명과 원주민 문화가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으며, 그것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예술로서 재조명되고 있었다. 그들은 석상과 민예품을 수집하고 전통 음식, 전통 음악, 원주민 옷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의 일부 여인들까지 직접 원주민 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리다 같이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는 유명인의 부인이 항상 화려한 원주민 복장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더 두드러져 보였고, 당시 원주민 문화에 대한 고조된 관심은 그녀를 한 층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프리다는 테우안테펙, 오아하카, 미초아칸, 할리스코, 유카탄 등 여러 지방의 토속 옷을 입었는데, 그 중에서도 테우안테펙 여인들의 옷을 즐겨 입었다. 이 지역은 모계사회에 대한 전설이나 여자들의 활발한 경제·사회 활동, 기품 있고 강인한 이미지로 인해 유럽과 미국, 멕시코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모도티는 1920년대 후반에 테우안테펙 여인들을 주제로 사진 시리즈물을 만들었고 디에고 리베라도 위엄 있는 그곳 여인들의 자태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돌로레스 올메도에게 테우안테펙 의상을 입히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당시 테우안테펙 여인들의 의상은 원주민 여성의 자유라는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이 지역 여인들은 억제할 줄을 모르며, 그녀들이 말할 수 없거나 행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목걸이와 금붙이 장식을 하고 푸른색이나 오렌지색 블라우스를 걸치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농담을 하거나 거래를 한다.35)


테우안테펙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해 준 것은 금실로 수놓은 옷과 화려한 레이스, 목걸이 등으로 장식한 복장이었다. 이미 프리다 자신도 대담성을 기질적으로 소유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쪽 문화를 접하면서 더 대담해지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복장과 장식도 마치 테우안테펙 여인들처럼 하고 다녔다.

프리다는 원주민 여성들의 옷을 입음으로써 여러 가지 장점을 누렸다. 일단 자신의 다리의 결함을 가려주면서도 화려하기도 한 원주민 의상은 디에고 리베라도 좋아하였으며, 무엇보다 멕시코의 전통을 드러내면서 여성의 권리와 민중을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리다가 원주민 의상을 입은 것은 단순한 소비적 키치(kitsch)가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 행위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36) 프리다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이 점을 이용하였다. 그녀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옷과 장식물로 다양한 연출을 했다. 말하자면 몸은 캔버스였으며 옷들은 물감이었던 셈이다. 그 그림은 전시관 벽에 가만히 붙어서 사람이 와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눈을 자극할 수 있으며 기분에 따라 금방 다시 그릴 수도 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그녀의 묘한 분위기와 어울려 카리스마마저 느끼게 한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그녀의 옷 장식은 더 화려해졌다. 마치 바로크 예술이 내부적 공허함을 숨기기 위해 지나치게 화려한 모습으로 표출된 것처럼 말이다. 프리다의 과식적이라고까지 할 만큼 화려한 장식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삶에 대한 욕구의 표출이기도 했다.

프리다 칼로의 의상은 언제나 사회적인 의사소통의 형식이었으며, 나중에는 고독의 해독제가 되었다. 말년에 병세가 악화되고 찾아오는 사람의 발길이 끊겼을 때, 그녀는 날마다 축제를 준비하듯 단장을 했다 [···] 프리다 칼로는 요염하게 보이려고 치장을 한다고 말했다 [···] 정교한 포장은 자신이 신체적 결함과 자기가 부서지고 죽어가고 있다는 슬픔을 보상받으려는 몸부림이었다.37)






프리다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갔듯이, 자신이 걸치는 옷을 가지고 화려한 연출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갔다. 가면처럼 시작된 외면이 점점 굳어져서 프리다와 동일시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연기자와 다른 점은 연기자는 확연히 드러나는 이중적인 삶을 살지만, 프리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끝없는 훈습과정을 통해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진행형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중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5) Ibid., p.258에서 재인용
36) Cfr. Tace Hedrick, Mestizo Modernism: Race, Nation, and Identity in Latin American Culture, 1900-1940, p.165.
37) 헤이든 헤레라, op.cit., p.162.


4.3. 동양으로의 접근

이스테카 신화에 따르면 신성한 장소인 오메요칸(Omeyocan)에는 여성적 요소인 오메시우아틀(Omecíhuatl)과 남성적 요소인 오메테쿠틀리(Ometecutli) 두 신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두 신으로부터 신들과 세상의 인간들이 탄생했다고 하며, 이 음양의 두 가지 요소는 이스테카 인들의 자연에 내재한 두 가지 큰 힘에 대한 믿음의 원천을 이룬다.38) 이러한 문화 속에서 성장한 프리다는 그림을 그릴 때도 세상을 두 가지 요소로 나누어서 표현하는 일이 많다. 밤과 낮, 달과 태양, 물과 불은 집요하리만치 함께 등장한다. 프리다는 리베라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도 이러한 거대한 우주의 두 힘의 조화로 여긴다. 그녀가 이따금 리베라에게 어머니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여신이나 달의 모성적 역할과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있는 자화상>(Autorretrato en la frontera entre México y los Estados Unidos, 1932)에도 해와 달이 등장한다. 오른 쪽은 산업화된 미국의 공장을 그렸고 왼쪽에는 피라미드와 그 아래 흩어져 있는 석상들과 땅에 뿌리를 드리운 다양한 꽃들을 그렸다.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 나오는 미국은 현대 산업 문명의 상징이었고, 그녀에게 고독감을 가중시킨 부정적 이미지의 삭막한 나라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손에는 멕시코 국기가 들려져 있고 시선은 멕시코를 향하고 있다. 손에 들린 담배는 고국 멕시코를 그리워하는 촉매제로 기능한다. 여기서 유독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피라미드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이다. 그것은 낮과 밤의 투쟁(또는 조화), 하늘과 땅의 결합을 보여주며 이러한 이중성은 이스테카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다.

<희망의 나무>(Árbol de la esperanza mantente firme, 1946)에서는 두 명의 프리다가 등장한다. 특이한 점은 상처입고 수술대에 누운 프리다는 뒤쪽에 위치하며 얼굴을 보이지 않고 돌아누워 있다. 그리고 그림의 우측 앞에는 자주색 테우안테펙 의상 차림의 또 다른 프리다가 한 손에는 척추 보조대를 다른 한 손에는 깃발을 들고 있다. 수술대 위의 프리다는 등의 칼자국이 있기는 하지만 과장되지 않았고 몸에 감긴 시트도 피가 묻지 않은 하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프리다의 그림에서 피투성이의 음산한 장면은 사라진다. 전면에 부각된 프리다의 모습 못지않게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림의 제일 뒤쪽에 우주선처럼 떠 있는 해와 달이다. 땅은 척박하며 갈라졌고 앞은 바위 절벽이다. 해와 달, 음과 양, 다친 프리다와 화려한 프리다가 연출하는 풍경은 절망적 평온함이다. 그러나 밤의 편에 앉아있는 프리다의 깃발에는 “희망의 나무여, 굳건히 자라라”라고 씌어있다. 음과 양의 이분법은 육체적 아픔이 있는 현실과 내면적 이상 세계, 현실과 꿈의 이중성에도 적용된다. 자주색에 금실 수를 놓은 옷을 입고 목걸이, 귀걸이에 머리의 붉은 꽃 모양의 리본까지 화려한 테우안테펙 복장을 한 굳건한 표정의 프리다가 이 두 프리다를 대표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미루어보아 이제 그녀는 자신이 겪은 그 끔찍한 사고와 고통스런 여러 번의 수술 같은 일들을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리다의 음양에 대한 사고는 동양과 만나면서 더욱 확고해진다. 그녀가 얼마나 동양의 음양사상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 <알라메다 공원의 어느 일요일 오후의 꿈>(Sueño de una tarde dominical en la Alameda Central, 1947)에 등장하는 프리다가 왼 손에 주역의 태극 물고기 모양의 장식을 들고 어린 모습의 디에고 리베라 뒤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머리에 원주민 터빈을 틀어 올리고 붉은 색 숄을 두른 프리다와 음양 상징물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동양의 결합을 의미한다.

프리다는 몇몇 글에서 Sadja 또는 Sadga라는 단어를 사인처럼 사용했는데, 그녀의 일기장 71쪽에는 Sadja라는 단어가 아주 큰 글씨로 씌어 있다. 이 단어는 원래 ‘하늘과 땅’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sadha의 다른 표기이다.39) Sadja아래에는 379라는 알 수 없는 숫자가 나오지만 개인적으로 각별한 숫자이거나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숫자일 것이다. 그리고 아래에는 주역의 물고기 음양 무늬가 자리하고 있고 끝에 de siempre(항상, 예전부터)란 말이 보인다. 1953년에 쓴 일기(127쪽)에는 3가지의 날짜가 나온다.

21 de Marzo. Primavera
Tao ☯ Mao

7 de Julio. Sadga 1953

8 de Diciembre AMOR.
Diego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세 가지의 ‘탄생’의 의미를 갖는다. 사라 M. 로버(Sarah M. Lowe)의 주장에 따르면, 이 일기가 씌어진 날짜는 3월 21일로 추정되는데,40) 이 날은 춘분으로서 농사를 주업으로 삼던 이스테카 인들과 마야 인들에게 이 날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농사일을 시작하는 날로서 태양의 기운이 만물에 생동감을 주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멕시코 인들은 춘분이 되면 들뜬 마음으로 피라미드로 몰려가 태양의 기운을 받는다. 따라서 프리다는 춘분을 맞이하여 하늘과 땅, 음과 양의 조화를 다시 한 번 생각했을 것이다. 첫 줄에 이어진 ‘道’(Tao)와 음양 무늬는 바로 이러한 고대 멕시코 사회의 믿음과 극동에서 천지운행의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음양론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른 쪽의 ‘Mao’은 자신이 평소에 존경하던 공산주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인 마오쩌뚱(Mao Tsetung)이며,41) 이것은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녀가 민중 혁명의 도래가 천지의 순리를 따르는 당연한 역사 진행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에 나오는 날짜는 자신의 생일로 여기는 날짜다. 실제로 그녀는 1907년 7월 6일에 태어났지만,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1910년에 태어났다고 말하고 다녔으며 생일도 7월 7일로 바꾸어버렸다.42) 여기에서도 자신의 이름 대신 Sadga를 사용했다. 마지막 날짜는 그녀의 사랑, 디에고 리베라의 생일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생일을 춘분과 병기함으로써 자신과 디에고 리베라의 탄생과 만남, 사랑, 혁명에 대한 관심 등이 운명적이고 우주적인 것이며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하루 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나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들과 조화를 이루리라. 내가 살아갈 날과 시간과 분은 내가 속한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속하겠지. 나의 광기가 작업 속으로 도주할 수단이 되지 못할 테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들 작품의 포로로 가둘 것이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은 오직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 이들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43)


프리다는 말년에 들어오면서 자연과 아주 친밀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하나의 나무나 동물처럼 상징하기도 배경에 꽃, 나무, 원숭이 등을 자주 등장시킨다.





<작은 사슴>(El venadito, 1946)에서 프리다는 자기를 사슴으로 표현함으로써 다시 한번 자기가 모든 생명체와 하나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출판된 그녀의 일기 87-91쪽에는 만물이 모두 서로 관계를 맺고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체적 사고와 윤회 사상을 연상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한 생각은 원주민들의 사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 어디선가 동물 하나가 태어나며, 사람의 운명은 탄생일을 상징하는 동물의 운명과 연결되어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멕시코의 민예품에도 남아있듯이 그들에게 반인반수의 탈들은 기괴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러한 예술품은 존재의 연계와 환생의 개념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프리다의 머리는 꽃이 될 수도 있고, 팔은 날개가 될 수도 있고, 몸은 사슴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초현실로 보이겠지만, 멕시코 원주민들에게는 생명에 대한 일상적 접근 방식이었다.44)

우리 모두는 총체적 기능의 한 부분이며 [···] 우리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되고 싶어 한다 [···] 우리는 수많은 존재들(돌, 새, 별, 미생물 등)을 통하여 살아 있으며 그 복잡한 관계와 윤회의 과정에 참여하며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과정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45)


1943년에 그린 <뿌리>(Raíces)에서는 아예 자연과 나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다. 프리다의 가슴과 배에서 나무 넝쿨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자라고 있으며, 그 식물의 물관은 핏줄로 되어있어서 그녀와 넝쿨이 서로 동일시되어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핏줄은 늘어져서 땅에까지 닿아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듯하다. 부제목 ‘자갈밭’이 말하듯이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갈라진 척박한 땅이고 그 돌밭은 감정이 이입된 표현주의의 굵은 붓 터치를 연상시는 듯 약간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칼로의 사고를 총체적으로 한 눈에 보여주는 걸작은 <우주, 지구(멕시코), 나, 디에고, 숄로틀이 어우러진 사랑의 포옹>(El abrazo de amor entre el universo, la tierra(México), yo, Diego y el señor Xólotl, 1949)이다. 하늘과 땅, 밝음과 어둠, 해와 달이 그림의 배경을 이루며 음양의 포옹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을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의 조화 속에서 멕시코라는 땅에 프리다가 엄마처럼 디에고를 안고 있다. 그녀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모성이 가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지의 한 쪽 팔에는 그들의 애견 숄로틀(Xólotl)이 잠자고 있다. 원래 숄로틀은 죽음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화적 인물이다.46) 우주와 인간이 어우러진 거대한 사랑의 포옹 속에 죽음을 벗어나려 도망치던 숄로틀도 달콤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들의 사랑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져버리고 자신들의 일부로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38) Cfr. Rémi Siméon, Diccionario de la lengua náhuatl o mexicana, México: SigloXXI, 1988. Miguel León-Portilla, La filosofía náhuatl, p.118
39) Sarah M. Loe, “Transcripción del Diario con comentarios”, en Frida Kahlo, El diario de Frida Kahlo, p.240.
40) Cfr. ibid., p.271.
41) 심지어 프리다의 일기장 103쪽에는 마오쩌뚱을 공자(Cong Tsé), 노자(Lao Tsé), 장자(Chang Tsé)와 같은 선상에서 ‘Mao Tsé’라고 표기하면서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42) 그녀가 태어난 해를 1910년으로 바꾼 것은 자신과 멕시코 혁명의 정신을 동일시해서였지만, 날짜를 7월 7일로 바꾼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태어난 날짜가 가지는 상징에 따라 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스테카 달력에 따르면 그녀의 원래의 생일인 7월 6일은 ‘죽음’(Miquiztli)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생일을 ‘사슴’(Mazatl)과 동일시되는 7일로 바꿈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을 드러낸다. 물론 그러한 믿음이 실제로 효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적극적으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변화시켜보고자 애쓴 흔적 중의 하나다. 7일이 속해 있는 시기는 또한 ‘꽃’(xochitl)과 관련이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프리다는 사슴과 꽃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게 된다. Cfr. Gannit Ankori, op.cit., p.244.
43) 르 클레지오, op.cit., pp.239-240에서 재인용.
44) Cfr. 헤이든 헤레라, op.cit., p.449.
45) Cfr. Frida Kahlo, El diario de Frida Kahlo, pp.248-250.
46) Cfr. Rémi Siméon, op. cit.







5. 결론

프리다의 작품에서 산산이 부서진 육체나 피, 보기 거북한 장면들도 추하거나 당혹스럽기보다는 깊은 감동을 준다. 굳이 그녀의 생의 역정을 모르더라도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흥은 줄어들지 않으며 더욱 강렬하다. 민화적인 기법과 초현실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프리다의 그림들이 오히려 사진을 능가하는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리다의 작품들이 고통스런 삶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평가는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결핍은 완전성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 너머의 세계였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는 법과 자신의 고통을 관조하는 강인한 면모를 보여준다. 프리다는 그 고통을, 절대자와 단절되어 홀로 자신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만 하는 실존적 인간의 고통으로 재인식하고 삶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녀의 작품은 누구나 이야기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주제인 ‘나란 무엇인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동적이거나 현란한 그림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그림은 우리에게 프리다 개인의 커다란 고통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와 아울러 조용히 자신의 근원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누구나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프리다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 절실했으며 그 표출 과정이 더 두드러졌을 뿐이다. 신체적 고통이 클수록 새롭고 강인한 모습을 만들어 가려는 열망은 커졌다. 프리다에게는 화폭뿐만 아니라 그녀와 관련된 삶 전체가 자신을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붓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언제나 자신의 언행과 몸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개념을 무한한 담론의 생산자로 확대한다면 프리다의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